청평사는 고려 때인 973년에 창건된 백암선원으로 시작해, 1068년 당시 명문세도가인 이의가 중건해 보현원이라 하였고, 1089년 그 아들 이자현이 문수원으로 중창했다. 청평사가 된 것은 1550년, 보우선사가 이자현의 호인 청평거사에서 이름을 따오면서부터다. 그런데 이 천년고찰은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 산사 혹은 방문객의 평균 연령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절이라고 한다.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 때문일 수도 있고, 소양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는 낭만적인 접근성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청평사에 얽힌 사랑의 전설 때문이리라. 옛날 당나라 태종에게 어여쁜 공주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공주를 짝사랑하는 청년이 평민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신분의 차이로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총각은 상사병에 걸렸고, 분노한 왕은 그를 죽인다.
하지만 죽어서도 공주와 함께 하겠다는 총각은 상사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온갖 처방에도 뱀은 떨어지지 않았고 공주는 야위어가자, 부처님에게 빌어보기로 했다. 그러다 발길이 닿은 곳이 고려의 청평사. 밤이 늦어 동굴에서 노숙을 하고 이튿날 잠깐 불공을 드리고 오겠다는 공주의 말에, 어찌된 일인지 뱀은 10년 만에 떨어져 주었다. 하지만 기다리다 조바심이 난 상사뱀은 공주를 찾아 절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청평사 회전문 앞에서 벼락을 맞고 폭우에 떠밀려 죽었다. 공주는 부처님의 은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3층 석탑을 세웠다.
당시 공주가 은거했던 굴은 공주굴, 3층 석탑은 공주탑으로 불리는데, 회전문은 상사뱀이 돌아나갔다고 해서 회전문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평사에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면, 상사뱀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한 것이 아닐까.
회전문은 마음이 드나드는 문 청평사 회전문을 처음 본 이들은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에 의아할 수도 있다. 문이 달린 것도 아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치도 없이 그저 뻥 뚫린 통로 같은 모습이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청평사 회전문은 回轉門이 아니라 廻轉門으로, 회전(廻轉)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이다.
중생들에게 윤회의 전생을 깨우치게 하려는 마음의 문이라는 의미. 불교에서는 생명이 6가지 세계를 계속 윤회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다음 세계가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의 현생을 잘 살아야 한다는 소리 없는 가르침이다. 사찰에는 보통 3개의 문이 있는데, 절 입구에 일주문, 중간에 사천왕문 그리고 맨 뒷면에 해탈문이 있다. 청평사 회전문은 사천왕문에 해당하고, 회전문 앞쪽에 곧게 뻗은 잣나무 두 그루가 일주문 역할을 한다.
청평사 김지홍 사무장에 의하면 요즘 한창 다람쥐들이 잣을 따느라 분주하다는데, 잣나무가 수명을 다해 올겨울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 해 안타깝다. 다른 나무로 대신하기도 어려워, 아마도 멋들어지게 솟은 잣나무 일주문을 보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일 듯싶다. 그렇다면 사찰 뒤쪽에 위치한다는 해탈문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청평사를 많이 가본 사람이라도 경내만 돌아봤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는데, 불이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모두 그 근원은 하나라는 뜻이다. 이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다고 하여 해탈문인데, 청평사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부도 2기가 있고 좀 더 오르면 해탈문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오르라 권하고 싶다. 계곡을 두어 번 건너야 하는 가파른 길이지만 적멸보궁이 있기 때문이다. 오봉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적멸보궁은 1979년에 세워진 것으로, 뒤편으로 더 오르면 석가사리를 모신 5층 석탑도 있다. 이곳에서 보는 풍광은 올라온 수고를 모두 씻어주고 감동까지 줄 만큼 절경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적멸보궁 터. 건물을 빼면 사람 몇이 겨우 설 수 있는 정도의 좁은 바위인데, 왼쪽 암벽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 쓰여 있다.
고려 때 여생을 이곳에서 보낸 이자현이 새긴 것으로, 적멸보궁은 그가 머물던 암자 ‘식암’의 터다. 식암은 두 무릎을 겨우 세우고 앉을 정도의 작은 방, 이자현은 이곳에서 누비옷을 입고 푸성귀 음식을 먹으며 참선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나라를 들썩이던 명문세도가의 자제인 이자현이, 이 깊은 산골로 들어온 이유가 궁금했다.
이자현이 만든 선원이자 고려정원
▲ 공주 상
이자현(1061~1125)은 고려 8대 현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열 명의 왕과 혼인관계를 맺어, 당대 최대의 문벌귀족인 인천 李씨 출신이다. 인물이 잘 생기고 성품이 맑았다는데, 23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29세에 대악서승이 되었다. 하지만 벼슬에 오른 그 해,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속세를 뒤로하고 자리를 잡은 곳이 청평사다. 그는 단지 부인을 잃은 슬픔 때문에 세상을 등진 것일까.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인천 李씨로 태어난 이상, 어떤 식으로든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자현이 부귀를 구하고 벼슬을 취하기는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집는 것처럼 쉬웠다(이황의 퇴계선생문집 제1권)’고 했을 정도. 하지만 역대 임금들을 쥐락펴락 하며 왕권까지 노렸던 사촌형제 이자겸이나 이자의와 달리, 그는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불교계는 왕실을 배경으로 종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였기에, 사회적으로나 불교적으로 다툼에서 벗어나 조용히 수행을 하려했던 것이리라. 고려 선종 6년(1089) 이곳으로 온 이자현은 보현원을 수리해 문수원이라 부르고, 산자락을 정원으로 꾸몄다.
구송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부근인 식암까지 3㎞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는 우리 정원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은 영지(影池)다.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이 연못에 과학이 숨어 있다. 연못의 북쪽 면이 남쪽 면보다 길지만, 정면에서 보면 정사각형으로 보인다. 이자현이 연못이 정방형으로 보이도록 원근법을 이용한 것이다. 연못에 비치는 오봉산의 자태가 휘어지지 않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 그런데 연못 안에는 3개의 돌이 있다. 청평사가 선(禪) 도량으로 쓰여서인지 가만 보면 마음 심(心)자로 보인다는데, 마음을 씻고 닦으라는 의미는 아닐까. 이자현은 37년의 여생을 이곳에서 수행과 후진 양성에만 몰두했다.
마음을 씻고 나를 만난다
그런데 청평사에는 여느 사찰과 다른 특이한 것들이 많다. 사천왕이 없고, 회전문 천장에는 향교나 서원에 있는 홍살문이 있으며, 회전문을 들어서면 긴 회랑이 이어져 있다. 또한 경내에 탑이 없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돌을 깔아 놓았으며, 수로 역할을 한 5개의 맨홀이 있고, 대웅전 소맷돌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모두 궁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청평사가 고려시대 왕들의 사랑과 국가적 관심을 받아 한때 221칸이나 되는 대가람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중창해 왕실의 원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남북한 통틀어 차별화 된 독특한 인문·자연경관을 지닌 청평사, 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에 깊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 문화 유적을 내려오며 이자현과 예종의 일화가 떠올랐다. 예종이 이자현에게 수신양성(修身養性)의 방법을 묻자, 이자현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이 최고라며 과욕에 주의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늘 집은 조금 더 컸으면 좋겠고, 월급은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고, 차도 조금 더 좋았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하는 갑남을녀의 세상살이. 청평사에서 일상의 고단함도 씻고, 과욕은 내려놓으며, 참 나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은 많아지고 나들이 하기엔 좋은 계절, 가을이다.
▲ 춘천 청평사 영지(影池). 이 영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정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오봉산(779m)이 비친다는 이 연못은 귀한 역사 유적이다.
자연환경 그대로 살려낸 국내 최고 ‘원림’
오봉산 비추는 영지 장관… 고려시대 문호 이자현 37년간 머물러
#고려 원림(園林), 영지(影池)는 정원(庭園)과 다르다.
이자현(李資玄)이 만든 우리나라 최고의 원림(園林), 영지(影池).
남북이 19.5m, 북쪽 호수 안이 16m, 남쪽 호수 안이 11.7m 로 되어 있는 청평사 영지(影池). 구송폭포를 지나면서부터 청평사 원림은 시작된다.
청평사 가는 길에 구성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거북바위가 보이고 그 위로 한걸음 다가가면 좌측으로는 이자현의 부도, 우측에는 영지(影池)가 있다.
영지에 머물러 유심히 살펴보면 호수 안에 3개의 돌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호수 안에 돌을 넣었을까? 자연석이라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아 보인다.
건축학자는 “연못에 있는 돌에 들어가서 연못을 바라보면 연못이 정방형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것은 이자현이 연못을 정방형으로 보이도록 원근법을 이용 남쪽호수 안보다 북쪽 호수 안을 더 길게 만들었던 것. 3㎞ 밖의 오봉산이 연못으로 들어와 휘어지지 않아 보이게 한 폭의 그림이 될 수 있도록 이자현이 만든 것이란다.
청평사 골짜기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아 원림(園林)을 가꿨는데 그 중심에 영지(影池)가 있도록 한 것도 이자현의 작품.
그것뿐이랴 청평사에 이르기까지 오봉산의 아늑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려 계곡, 폭포, 기암괴석, 정자와 암자를 자연과 어울리도록 배치하여 이자현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했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학자는 영지(影池)를 일본이 자랑하는 교토(京都)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 정원이라고 하지만 정원(庭園)과 원림(園林)은 다르다.
자연을 사람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의 정원(庭園).
사람이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했던 우리의 원림(園林).
원림(園林)은 뜰 개념인 정원(庭園)과 다르다. 자연환경을 이용해 건축물을 배치하여 그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사람이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했던 원림(園林).
자연 속에 정자를 짓고 회랑을 만들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모양을 낸 창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며 세월을 노래할 수 있는 우리의 원림(園林).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조경은 정원(庭園)이 아닌 원림(園林)이라고….
이곳에 가면 고려시대 원림(園林)을 맛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수백년, 수천년을 내다보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방법을 청평사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자현이 선택한 부귀영화보다 더 좋은 곳
우리의 원림(園林)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곳이다.
청평사는 그래서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는 곳.
이자현의 <진락공 부도>, <문수원 기비> 등이 경내에 남아 있지만, 김시습, 이황, 정약용 등이 이자현을 기리는 시문을 남기기도 한 곳.
이자현의 ‘문수원 거문고’는 자기수련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수기(修己)가 이루어졌음을 노래하고 세상 사람이 알아주든 말든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게 되는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읊은 것인 듯하다.
김시습의 ‘청평산 세향원(細香院)에서’ ‘유객(有客-나그네)’ ‘소양정에 올라’를 비롯하여 문수원을 청평사로 바꾼 허응당 보우 스님의 남지조영(南池照影)에서는 영지(影池)의 정취를 “가지와 잎이 무성한 박달나무 아래에 고경(古境) 같은 남지가 매우 밝도다…”라고 표현하여 물아(物我)의 마음을 잊으려고 하였다.
이자현은 일찍이 청평거사(淸平居士)로 자처하며 고려 왕경 개경으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이곳에서 숨어살았던 고려시대 이의의 아들.
그의 재능을 아낀 예종임금이 수차례 불렀으나,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깊고 깊은 산중에 들어와 넓은 원림(園林)을 벗 삼아 37년간이나 머물렀던 곳. 경운산(慶雲山)이라 부르던 것을 더러운 것을 맑게 하고(淸), 소란스러운 것들을 평화롭게 한다(平)는 청평산으로 바꾸고 보현원(普賢院)이라 부르던 것을 문수원이라 개칭하여 평생을 수도 생활한 거사(居士).
당시 사촌형 이자겸이 임금을 쥐락펴락하는 귀족독재에 대한 반감을 갖고 이곳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자기만의 왕궁을 만들어 신하 없는 임금이 되었으리라.
▲ 구성폭포
가을하늘 머금은 소양호가 한 눈에
취재차 가는 길이라 해도 춘천으로 향하는 내내 부푼 가슴은 어린아이처럼 콩닥거렸다. 춘천은 그만큼 추억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강촌, 남이섬, 중도 등의 명소는 물론 소양호, 의암댐으로 인해 생겨난 내륙의 바다와 그 물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 설레지 않을까. 더구나 목적지가 청평사인 만큼 그 기대는 더욱 컸다.
청평사로 가기 위해 일행은 소양호로 향했다. 향기를 머금은 것만 같은 바람을 기분 좋게 맞으며 얼마를 달리자 앞을 턱 가로막는 소양강 댐의 제방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무려 123m의 높이에 제방 길이가 530m, 총 저수량이 29억t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력(沙礫)댐이라 하니 그 모습이 가히 압도적이다.
도로를 따라 댐 윗길로 접어들자 소양호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수면 면적이 70㎢에 달한다 하니 말 그대로 내륙의 바다라 할 만하다. 드넓은 소양호의 물빛은 가을 하늘을 가득 담아 쪽빛으로 빛났다. 이 내륙의 바다를 오가는 배가 청평사는 물론 소양호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섬마을 곳곳과 멀리 인제까지 다닌다고 하니 춘천이 왜 호반의 도시인지는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한민족 아픈 역사 함께한 극락전
8개 부속 암자 거느린 사찰… 한국전쟁 전후 대다수 소실
사실 천년고찰인 청평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고려시대 8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린 규모 221칸의 대찰이었고, 조선시대 문정왕후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보우대사가 극락전과 회전문을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불사가 이루어졌던 청평사.
특히 극락전은 당시 최고의 기술로 지어 궁궐 못지않게 화려한 건물로 국보(구 국보 115호)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청평사는 해방 직후 38선이 그어지면서 수난을 겪는다. 38선으로부터 불과 1.5km 떨어진 탓에 한국전쟁 전후 크고 작은 교전이 이어지면서, 회전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됐다. 극락전도 1949년 소실됐고, 청평사는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었다.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소양호가 생기며 뱃길로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1977년 극락보전과 삼성각 시작으로, 1979년 해탈문과 적멸보궁, 1984년 요사와 청평루·서향원, 1988년 대웅전, 2000년 관음전과 나한전, 2002년 행각과 경운루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극락보전은 극락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으나, 원래의 풍모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왜소하다고 해 아쉽다. 다행히 극락보전 왼쪽에 있는 주목 두 그루는 한국전쟁을 비껴갔다. 각각 수령이 800년과 500년으로 강원도가 지정한 보호수다. 높이는 10m 정도로, 워낙 느리고 단단하게 자라는 나무다보니 1년에 1cm 정도 자란 셈. 두 주목은 이자현의 선원 시절, 고려와 조선의 수많은 문객들이 머물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세월의 장엄함과 무상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래서일까 주목 아래 줄줄이 이어진 작은 돌탑들, 이곳을 오간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사랑을 이어주는 신비의 ‘공주탑’
젊은 연인들에 인기
▲ 공주탑
청평사 계곡의 옛길, 환희령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위에 서 있는 3층 석탑. 거북바위를 지나 영지 연못을 가다보면 왼쪽 냇가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작고 아담한 탑. 사찰 길목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홀로 서 있는 이 탑은 일명 공주탑이라 부른다.
대부분 탑은 사찰마당 한가운데인 금당 앞마당에 세워야 하는데, 이탑은 엉뚱한 데 세워져 있는 셈이다. 이런 현상은 흔치 않지만 흔히 원탑, 또는 공양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통일신라 탑의 특색인 3층으로 된 탑신과 이중기단(二重基壇)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진 것이 아쉽다.
3층 석탑은 탑신부의 옥개(屋蓋:지붕돌), 옥신(屋身:몸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옥신에는 모서리마다 건물기둥을 상징하는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는 탑, 그 높이가 3.08m 이지만 계곡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사연만큼이나 애틋하다. 자기를 사모하다 죽은 상사뱀을 위해 구송폭포 위에 공주가 세워준 탑, 그래서 공주가 노숙했던 작은 동굴과 공주가 목욕했던 작은 웅덩이 공주탕을 바라보며 저승에서나마 연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공주의 애틋한 정성이 깃든 탑이 청평사 3층 석탑이다.
젊은 연인들이 유난히 이 탑을 많이 찾는다.
그것은 상사뱀의 진심을 알아준 공주가 마음을 움직여 저승에서도 이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사랑이 깃든 탑이기 때문이란다. 이제 막 새롭게 사귀려는 연인들이 이 탑에 간절히 기도를 하면 영원히 변치 않고 사랑을 이어간다는 사랑의 언약 장소로, 다툼을 하고 헤어지려고 하는 연인들을 이어주는 사랑의 가교의 장소로, 짝사랑하는 젊은이가 소원을 빌면 사랑을 이루어 준다는 신비의 탑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나타난 사랑의 신드롬이 바로 청평사 3층 석탑이다.
이곳에 가면 공주탑과 함께 공주가 목욕을 한 공주탕, 공주가 노숙했던 동굴, 공주의 애환이 서린 공주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